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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뭘 알겠어?”...비웃음에도 용감하게 뛰어든 그녀, 그들 가운데 우뚝 서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
입력 : 
2025-03-17 18:00:00
수정 : 
2025-03-22 20:13:06

뉴스 요약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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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줄리아&줄리>의 주인공 줄리아 차일드는 실존 인물로, 그녀의 요리 여정은 남성 중심의 프랑스 요리계에서 역경을 극복하며 만들어졌습니다.

한인 여성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만드는 세실 박은 와인 업계에 뛰어들며 일본, 중국,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 수출하는 이노바투스를 탄생시켰습니다.

세실 박은 나파 밸리에서 한국의 농법을 접목하여 K-농업을 도입하고자 하는 다음 목표를 세우며, 자신만의 독 창적인 이야기를 담은 와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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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 is it that you really like to do, Julia?”(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뭔데?)

영화 <줄리아&줄리>의 주인공 줄리아는 외교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프랑스 파리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실용을 우선시하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미국인으로서 살아온 그녀의 행동은 기품과 예절을 따졌던 당시 파리지앵들에게는 놀림거리 혹은 비웃음거리로 비춰졌기 때문입니다.

줄리아는 주변의 이런 시선을 의식하고 의기소침해지지만, 낙천적인 미국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곧 스스로 다시 삶의 의미를 찾기 시작합니다. 위의 질문은 이 과정에서 줄리아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 요리라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에 입학하게 됩니다.

줄리아가 르 꼬르동 블루에 입학했다고해서 모든 고난이 끝나진 않습니다. 당시(195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이 르 꼬르동 블루에 입학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사례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어딜 가도 눈에 띄는 초장신(188㎝)에다가 프랑스어를 거의 하지 못했던 미국인이었기 떄문입니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이방인 취급을 당했지만,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노력으로 편견들을 하나씩 극복하고 결국 프랑스 요리의 진수를 배우게 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줄리아 차일드는 실존 인물입니다. 줄리아는 70~80년대 미국 전역에 방송되던 TV쇼 요리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프랑스 요리 전문가였는데요. 영화에는 그녀가 프랑스 요리의 전문가가 되기까지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담겼습니다.

갑자기 영화 <줄리아&줄리>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오늘 소개할 이야기의 주인공이 영화 속 줄리아 차일드를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한인 여성 최초로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에서 와인을 만드는 양조자, 세실 박(Cecil Park)과 그녀의 와인인 이노바투스(Innovatus) 입니다.

봄을 맞이한 이노바투스 와이너리의 포도나무들. 이노바투스 제공.
봄을 맞이한 이노바투스 와이너리의 포도나무들. 이노바투스 제공.
아무것도 없이 무모하게 시작한 여정

영화 속 줄리아 차일드는 미국 여성으로 전후 프랑스 요리계라는 철옹성 같은 남성 중심의 세계에 주저 없이 뛰어듭니다. 또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현재의 블로거 줄리 파웰 역시 뉴욕의 평범한 직장 여성으로, 세상이 주지 않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만들고자했죠.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일 겁니다. 가난한 가정, 사회의 편견, 자리를 보장해 주는 유산도 없이 업계에 뛰어든 셈입니다.

세실 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 명문대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식품회사에 취직해 안정적인 길을 걸었지만, 공부를 위해 찾은 이역만리 샌프란스시코에서 그 전까지는 관심도 없던 와인과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그녀는 “생명공학을 전공한 공대생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이게 어떻게 만들어지는건가’라는 호기심이었다”고 회고합니다.

하지만 와인 업계는 누구도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지극히 서구적이고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업계였기 때문에 작은 체구의 모국어도 다른 동양인 여성, 거기에 와인을 공부한 적도 없는 그녀는 철저하게 이방인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와인을 좋아했고, 완전 초보의 심정으로 유명하고 잘 알려진 나파의 와인 연구소에 무작정 지원하면서 모든 게 시작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했다”고 기억했습니다.

마치 영화 속 줄리아처럼 주변의 시선, 안정성, 유산 등은 아랑곳하지 않고 꿈만을 좇은 시간이었던 셈입니다. 그나마 세실 박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그녀가 택한 곳이 비교적 외부인에게 관대하고,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미국이었다는 점입니다.

한인 여성 최초의 나파밸리 와인 양조자, 세실 박. 아영fbc 제공.
한인 여성 최초의 나파밸리 와인 양조자, 세실 박. 아영fbc 제공.
자유분방한 문화가 준 기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세실 박이 자신의 와인을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와인 업계에 투신한지 몇년 지나지 않아 프라이빗 와인을 만들어주는 와인컴퍼니, 와인포니아(Winefornia)를 설립했고, 이윽고 와인 양조와 관련해서는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인 UC 데이비스에서 전문 학문으로서 와인을 공부하게 됩니다.

재밌는 점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와인을 공부하기도 전에 이미 상업적인 와인을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바로 프라이빗 와인인데요. 프라이빗 와인이란,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주문을 의뢰해 만들어진 소규모 목적성 와인을 일컫습니다. 결혼식이나 기념일, 아기의 탄생 등을 위해 소규모로 그 목적에 맞는 와인을 ‘맞춤 제작’하는 문화입니다. 가라지 와인(Garage Wine·창고에서 만드는 소규모 와인)이기도 합니다.

남의 눈치를 지극히 의식하는 우리나라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럽이었다면 어쩌면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의 자유분방한 문화가 그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게된 셈입니다. 그녀는 “큰 마켓(시장)을 부담해야 하는 생산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자유롭고 모험적인 도전을 할 수 있었고, 큰 경험이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남의 기념일 와인을 만들어주던 세실 박은 2014년엔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와인을 만들겠다며 나파밸리에 몸을 맡긴지 7년, 드디어 이노바투스가 탄생합니다. 매년 800~1200케이스(1케이스=12병)를 생산하는데, 미국 내수용을 제외하고는 중국과 일본, 한국, 캐나다 등에 수출되고 있습니다.

세실 박이 생산하는 이노바투스 와인. 아영FBC 제공.
세실 박이 생산하는 이노바투스 와인. 아영FBC 제공.
혁신이란 이름의 와인

그런데 이노바투스라는 이름이 재밌습니다. 영어로는 이노베이션, ‘새롭게 창조된 것’ 즉 혁신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입니다. 어째서 이런 이름을 달게 된 것일까요. 와인의 이름에는 이방인으로서, 또 이 분야에 아무런 유산이 없는 1세대 개척자로서의 애환을 담았습니다. 그녀는 “유산이 없다는 게 한 때 열등감이었던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게 되는 이들이 흔하게 겪는 컴플렉스죠.

하지만 이노바투스는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혹은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나파밸리에서 적게는 수십년, 많게는 수백년 동안 선대로부터 빚어온 와인을 빚어가는 터줏대감들이 울창한 숲이라면 그녀와 같은 신생 양조자들은 잡초인 셈인데요. 선대로부터 내려진 뿌리가 없어도 생존이 가능한 혁신적인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미 정도로 판단됩니다.

재밌는 점은 빈티지마다 와인의 향과 맛이 상이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매년 포도의 맛이 똑같을 수 없고, 물려 받은 유산(땅, 양조기술)이 없는 세실 박의 상황에서 기인합니다. 그녀는 어쩌면 절망일 수도 있는 자신의 조건을 아예 새로운 창조의 고리로 삼았습니다. 매년 똑같은 맛과 향을 가지는 것보다, 그 해 포도밭에서 맛봤던 포도의 맛을 좀 더 잘 담고 있는 와인을 만들겠다는 이상향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요.

그녀는 “이민자로서, 여성으로서 나파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늘 남들과 다르게, 고정관념을 깨는 독창적인 생각이 필요하다”며 “포도밭에서 맛봤던 포도를 그대로 구현해내는 게 이노바투스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이노바투스 뀌베 레드(Cuvee Red)의 경우, 그동안 와인 업계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쉬라(Syrah)와 피노누아(PInot noir) 품종을 섞어(블렌드) 만들어졌습니다. 맛의 밸런스를 찾기 위해 때로는 메를로(Merlot)나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이 혼합되기도 하는데, 이로써 이국적인 맛과 향기가 가득해두 품종의 매력을 묘하게 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주 특별합니다. 이런 시도는 아무도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전통적인 와인 생산지에서 규제하는 그들 만의 전통 방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와인을 창조해낸 셈입니다. 가진 게(유산) 없으니, 오히려 형식과 고정관념에 구애 받지 않게된 겁니다.

이노바투스와 세실 박. 그녀는 전례를 찾기 힘든 스타일의 와인을 양조해냈다. 아영fbc 제공.
이노바투스와 세실 박. 그녀는 전례를 찾기 힘든 스타일의 와인을 양조해냈다. 아영fbc 제공.
새로운 도전을 꿈꿀 때 어울리는 와인

세실 박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녀의 다음 목표는 ‘K-농업(K-Farming)’ 접목이라고 합니다. 지력을 관리하고 돋우는 데에 특화된 우수한 우리나라만의 농법들을 나파 밸리 와이너리에 도입하고 싶다고 합니다. K-뷰티, K-드라마, K-무비 등 K-문화(Culture) 열풍이 태평양 너머 나파 밸리 땅에서는 K-농업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영화 <줄리아&줄리>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줄리아 차일드는 프랑스 요리계의 벽을 넘어 자기 만의 맛을 창조했습니다. 세실 박도 나파 밸리의 편견과 그들 유산의 텃세를 넘어서 이방인으로써 이노바투스라는 이름의 와인을 만들어냈죠. 둘 다 가진 게 없었고, 그 분야에서 물려 받을 유산이랄 게 없었습니다. 또한 이방인으로 텃세도 견뎌야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을 참고 견뎌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피워냈습니다. 각자 음식과 와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결국 줄리아 차일드가 ‘프랑스 요리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미국 요리 역사를 바꾸었듯, 세실 박도 한 병의 와인으로 세계인의 식탁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전하게 됐습니다.

실제로 맛본 이노바투스는 보통의 나파밸리 와인이 가지는 쨍하고 주관 강한 과실미와 달리 섬세하고 복합적인 맛이 전해졌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레드 뀌베의 경우, 제법 많은 와인을 테이스팅 해본 저로써도 뭐라고 단정짓거나, ‘무엇과 비슷한 느낌이다’라고 언급하기조차 어려운 미묘한 복합미가 돋보였습니다. 혁신, 새로운 것이라는 이름 그대로 오롯이 세실 박만의 새 와인을 창조해낸 것이죠.

혹시 새로운 도전을 꿈꾸시나요? 그렇다면 이노바투스와 함께 결의를 다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첫 모금에는 겸손과 정직한 노동의 향을, 두 번째 모금에는 텃세와 편견을 뛰어넘는 강인함을, 그리고 세번째 모금에서는 조용한 승리와 창조의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사진설명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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