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에 TC본더를 공급하면서 한미반도체 독주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사진은 한미반도체 인천 공장. (한미반도체 제공)
한화세미텍, 하이닉스 공급 계약
한미반도체 독점 체제 균열
한화세미텍은 최근 SK하이닉스의 품질 검증(퀼테스트)을 최종 통과하고 210억원 규모 HBM 제조용 반도체 장비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한화세미텍이 공급할 장비는 HBM 제조의 핵심 장비인 TC(Thermal Compression)본더다. 정확한 납품 대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10대 안팎으로 추정된다. 한화세미텍은 지난해부터 SK하이닉스와 협력하며 기술 개발에 공을 들여왔다. 한화세미텍 측은 “고객사의 품질 검증을 거쳐 양산에 성공하면서 HBM TC본더 시장의 첫 물꼬를 텄다”고 밝혔다.
TC본더는 HBM 후공정 핵심 장비인 열 압착 본딩 장비다.
반도체 공정은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뉜다. 전공정은 원재료인 웨이퍼에 집적회로를 그려 전기적 특성을 지니도록 가공하는 과정이다. 후공정은 기판 위에 만들어진 회로를 하나씩 자르고 배선을 연결, 패키징한 후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사하는 단계다.
HBM은 고성능 AI 연산에 특화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로 꼽힌다. 기판 위에 최대 12개 메모리 트랜지스터를 쌓아 올리는 적층 방식으로 제조한다. 칩을 연결하는 패키징 즉 후공정 기술이 핵심이다. HBM을 제작하려면 열 압착 방식으로 가공이 끝난 칩을 회로 기판에 부착하는 장비인 TC본더가 필요하다. TC본더는 차세대 HBM 반도체 칩 수직 적층 생산성, 정밀도 향상 패키징에 활용된다.
덕분에 시장 전망도 밝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에 따르면 전 세계 HBM용 TC본더 시장 규모는 2024년 4억6100만달러(약 6700억원)에서 2027년 15억달러(약 2조1800억원)로 세 배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TC본더 시장은 오랜 기간 한미반도체 독주 체제였다. 한미반도체는 2017년부터 SK하이닉스와 함께 TC본더를 개발한 이후 실적이 날개를 달았다. 한미반도체는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5589억원, 영업이익 2554억원을 기록했다. 1년 새 매출은 251%, 영업이익은 무려 638%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이 46%에 이를 정도다. 여세를 몰아 2026년 매출 목표 2조원을 기대한다.
한미반도체 실적이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것은 엔비디아 등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들의 고성능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TC본더 수요가 늘어난 덕분이다. 한미반도체는 그동안 SK하이닉스에 주로 TC본더를 공급해왔는데 지난해부터는 미국 마이크론에도 TC본더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AI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미국 엔비디아, 브로드컴에 적용되는 HBM3E 12단 제품의 90% 이상을 한미반도체 장비로 생산해왔다. 덕분에 HBM 생산용 TC본더 시장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자랑한다.
여세를 몰아 한미반도체는 인천 서구 주안국가산업단지에 총 8만9530㎡(2만7083평) 규모의 반도체 장비 생산 클러스터를 갖추기로 했다. 곽동신 회장은 “세계 최대 HBM TC본더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올해 TC본더 300대 이상 출하를 차질 없이 진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한미반도체 기술력 강조하지만
싱가포르 업체도 참전…1위 흔들릴 듯
그러나 최근 한화세미텍, 싱가포르 장비 업체 ASMPT 등 경쟁사들이 TC본더 시장 적극 공략에 나서면서 잘나가던 한미반도체에 빨간불이 켜졌다.
한화세미텍은 2020년부터 개발하기 시작한 TC본더 기술을 지난해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올렸다. 지난 2월 열린 국내 반도체 박람회 ‘세미콘코리아’에 처음 참가하면서 HBM용 TC본더 기술을 선보였다. ‘3D 스택(Stack)’이라는 자체 기술로 반도체 칩 크기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앞세웠다. 덕분에 SK하이닉스와 TC본더 공급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특히 한화세미텍은 한화 오너 일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회사인 만큼 더욱 눈길을 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삼남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직접 미래비전총괄을 맡으면서 경영에 참여했다.
TC본더와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 기술인 하이브리드 본더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김동선 부사장은 “TC본더 시장에서는 후발 주자에 속하지만 시장 경쟁력의 핵심은 오직 혁신 기술”이라며 “한화세미텍만의 독보적 기술을 앞세워 빠르게 시장을 넓혀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향후 한화세미텍으로부터 TC본더 주문량을 대폭 늘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화세미텍뿐 아니다. 싱가포르 장비 업체인 ASMPT도 HBM용 TC본더를 SK하이닉스에 납품하는 등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미 지난해 SK하이닉스 생산라인에 ASMPT 장비 30여대가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최신 5세대 HBM 16단 제품에 ASMPT 장비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경쟁사 움직임이 심상찮자 한미반도체는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주가도 하락세다. 한미반도체 주가는 지난해 6월 18만원을 넘어섰지만 이후 급락하면서 8만원대까지 떨어졌다(3월 19일 종가 8만8500원).
주가가 급락하자 한미반도체를 이끄는 곽동신 회장은 연일 자사주 매입에 나서는 모습이다. 지난 2월 20억원 규모 자사주를 매입한 데 이어 최근에도 30억원 규모 자사주 취득에 나선다고 밝혔다. 곽동신 회장 지분율은 33.97%에서 34%로 높아졌다.
곽 회장은 직접 나서 경쟁사에 강도 높은 견제구를 날리기도 했다. 곽 회장은 최근 보도자료를 통해 “우리는 싱가포르 ASMPT, 한화세미텍과 상당한 기술력 차이가 있다”며 “이번에 SK하이닉스로부터 수주받은 한화세미텍은 결국엔 흐지부지하게 소량의 수주만 받아가는 형국이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HBM 반도체 장비 독점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경쟁사에 대한 압도적 기술 격차를 과시해 1강 체제를 끌고 가려는 포석이란 분석이다.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 간 신경전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한미반도체는 2021년 당시 한화세미텍으로 이직한 전 직원 대상 부정경쟁행위금지 소송을 제기해 1심과 2심 모두 승소했다. 한화세미텍 측은 “허위 주장”이라며 맞서는 가운데, 한미반도체는 내부적으로 기술 유출 보안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이와 별개로 한미반도체는 지난해 말 한화세미텍이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추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화세미텍 참전으로 한미반도체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SK하이닉스는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재계에서는 TC본더 시장 키를 쥔 SK하이닉스가 한미반도체 이외 다른 기업에 더 많은 기회를 주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정 기업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제품 가격 협상이 쉽지 않은 데다 시장 변화에도 발 빠르게 대응하기 어려운 탓이다. 이 때문에 더더욱 한미반도체 입장에서는 선두 자리를 지키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2호 (2025.03.26~2025.04.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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